인천 서구 빵집 추천) 전국 빵순이 빵돌이 모여라~!



여러분들은 빵 좋아하시나요? 서구청 블로그 기지는 빵을 무척이나 좋아한답니다.

간식으로 먹어도 좋고, 식사대용으로 먹어도 참 좋기때문이에요^^

대한민국의 빵순이 빵돌이들을 위해 준비한 오늘의 포스팅은~!

바로바로 서구 빵집 소개 +3+)9

서구에 어떤 빵집들이 있는 지 함께 알아볼까요?





"알벤토"란 레드빈 팥의 앞 스펠링R과 인벤터 발명가 BENTO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알벤토는 모든 빵에 유기농 밀가루만 사용하고 있는데요. 입맛은 물론 건강까지 생각하는 빵집이랍니다. 




알벤토 기사 바로가기 : http://noulnori.net/1867






아미꼬떼에서는 빵에 국산 100% 쌀가루를 섞어 최대한 건강을 따지며, 재료 자체를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구입한다고 합니다. 또한 아미꼬떼에서는 일반빵은 국내가공 밀가루와 쌀가루 20%를 이용하여 케이크류와 과자를 만들고 유럽빵은 프랑스 밀가루에 국내산 쌀가루 80%를 섞어 쌀식빵과 맛있는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미꼬떼 기사 바로가기 : http://noulnori.net/2369




엥겔베르그 제과점에서는 유기농 밀가루는 물론 화학첨가제 대신 천연발효종을 이용해 빵을 만든다고 합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비건식빵도 판매하고 있다고 하니, 채식주의자분들 꼭~ 엥겔베르그에 들려보셔야겠죠?





엥겔베르그 기사 바로가기 : http://noulnori.net/2232







청라호수공원 주변에 위치한 레이스레시피, 제이스레시피의 모든 빵은 저온발효빵으로 합성첨가물을 넣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당일 만든 빵만 판매하기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푸드트럭이 왔다갔다 한답니다.





제이스레시피 기사 바로가기 : http://noulnori.net/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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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에 오면 6.25전쟁 함께 싸워 준 콜롬비아 참전비가 있어요.


다가오는 6.25일이 무슨 날인지 모두 알고 계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6.25를 맞이하여 오늘은 서구 가정동에 위치한 콜롬비아 참전비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란에 휩싸인 대한민국을 구하고자 UN은 즉시 파병을 결정합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UN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 미국만이 아닙니다. 저 멀리 남미에서 온 콜롬비아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콜롬비아는 남미국가 중 유일하게 6.25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머나먼 곳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참전을 결정하자마자 미국식 장비로 재무장한 후 미 교관단으로부터 12주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189명이 탑승한 해군 프리깃함도 한국 해역에 투입할 준비를 하기 위해 진주만에서 미 해군과 합동훈련에 나섰는데요. 


1951년 4월 프리깃함 파딜라호가 한국을 향해 출항한 데 이어 1천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1보병 대대도 5월 21일 미국 수송선을 타고 콜롬비아를 떠났습니다. 이들은 1951년 6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한미 고위 장성 그리고 한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부산에 입항했다. 육군으로는 UN군 중 마지막으로 한국에 도착한 것인데요. 


콜롬비아는 총 4회에 걸쳐 교대 병력을 합쳐 연인원 5천100여 병력을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6.25 전쟁 중 김화 400고지 전투, 연천 180고지 전투, 골모고지 전투 등에서 격전을 치렀습니다. 군율이 엄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났으며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모토를 지켜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참전 기간 중 전사 143명, 실종 69명, 포로 30명과 부상자 등의 고귀한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휴전이 된 1953년부터 1954년까지는 유엔군 방어작전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전국에 6.25 참전국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이 진행됐습니다. 인천에는 콜롬비아군 참전비 건립이 결정됐습니다. 그해 9월 24일 서구 가정동에 비(碑) 높이 10m, 기단 높이 2m의 콜럼비아군 참전비가 세워졌는데요. 매년 콜롬비아 독립기념일에 주한 콜롬비아 대사와 6.25참전유공자회 서구지회 회원들이 참석해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무심 속에 멀리서 불어온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동상의 군인들은 인천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서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생명을 바친 그들의 고귀한 뜻이 비문에 몇 자 적혀 있습니다. 


‘카리브해 바다의 정기를 타고난 콜롬비아 용사들! 국제연합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마침내 611명의 고귀한 생명이 피를 흘렸다. 우리는 그들을 길이 기념하고자 여기에 비를 세운다.’


한편 6.25 전쟁에 UN은 16개국의 전투부대를 파견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을 했습니다. 모두 6대륙 21개국에서 전투부대 연인원 193만8천330명이 한반도로 건너왔다. 그들의 희생은 컸다. 전사·실종은 4만4천786명, 부상은 10만4천280명에 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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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도시철도 2호선 7월 30일 전면 개통


인천도시철도 2호선이 오는 7월 29일 개통식을 갖고, 7월 30일 05:30 첫차 운행을 시작으로 전면 개통됩니다.


인천도시철도 2호선은 2007년 1월 기본계획(변경) 수립용역을 시작으로 2009년 6월 착공해 총사업비 2조 2,592억원(국비 13,069억원, 시비 9,513억원)을 투입해 7년 2개월간의 공사를 모두 마치고 이번에 개통하게 됩니다.


서구 검단오류역을 기점으로 인천시청역을 지나 종점인 남동구 운연역을 잇는 노선으로 총연장은 29.2㎞에 이르며, 정거장 27개소, 차량기지·주박기지 각 1개소 규모로 건설됐다. 특히, 안전하고 편리한 최첨단 완전자동 무인운전 시스템을 구축했는데요.




인천도시철도 2호선이 개통되면 공항철도(검암역), 서울도시철도 7호선(석남역, 2020년 예정)과 경인선 1호선(주안역)은 물론, 인천도시철도 1호선(인천시청역)과의 환승체계가 구축돼 도심교통난 해소 및 다른 교통수단의 수송분담율 감소 효과에 따라 도심교통 혼잡을 줄여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특히, 서구와 남구 및 남동구지역 이동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돼 대중교통 이용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편의시설로는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휠체어와 유모차의 통과가 가능한 개찰구가 갖춰져 있으며, 각 정거장마다 장애인 화장실과 아기수유실, 승강장 스크린도어 설치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설을 갖췄습니다.


안전시설로는 승강장 및 차량 내 실시간 CCTV를 설치했으며, 비상 인터폰 방송 및 호출 버튼 등을 설치해 종합관제실과 연계되도록 했습니다. 또한, 원격제어가 가능한 시스템으로 비상탈출 등 비상상황에 신속하게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만약의 화재사고에 대비해 불에 타지 않는 불연재로 차량을 제작하는 한편, 각 차량 마다 화재 감지기 및 소화설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신성장 동력 확충을 위해 도시철도 역사 내에 국내 최초의 지열 시스템을 적용해 냉·난방에 이용하는 등 신재생에너지의 보급을 확대시켜 에너지 절약 및 저탄소, 친환경 인프라를 구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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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드디어 서구를 지하철 타고 가는군

    2016.05.18 21:3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ㅇㅇ

    난 버스가 싫다구

    2016.05.18 21:3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김인환

    기대 충만합니다!^^

    2016.05.18 23:1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4. 기대됩니다. ~~

    2016.05.30 11:0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5. 넘 기대됩니다 ~^^ 그런데 2칸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우려되네요
    이왕에 하시는거 최대 5칸이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네여 ~~

    2016.06.23 12:0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사진으로 보는 인천광역시 서구 풍경 54탄! <연희교회와 김윤화 김기선 부자>



 서구문화원에서 발행하는『 문화서구』에도 게재된 바 있지만, 이번 호에는 연희동 출신 김기선(金基善 1884~1963)과 연희감리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 소상히 나와 있다.





“율목동 211번지의 기와집이 ‘미국집’ 김기선 씨 댁이었다. 그는 1885년에 서천 연희리에서 누대를 지낸 토반 상산김씨 윤화(閏花)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인천해관의 직함을 갖게 되어 인천으로 이사와 내리교회 교인이 되었다.”


김윤화가 교인이 된 것은 그가 인천해관에 근무하면서 서양인들과 접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전도를 받은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따라 기선도 자연스럽게 내리교회 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집’은 김기선이 영어를 잘 하고 미국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동네에서 붙인 별칭이다. 다음도 역시 신 박사의 글이다.


“김윤화는 1902년 내리교회 조원시 목사가 주선한 하와이이민회사를 이용하여 개명 교육을 받도록 외아들인 기선과 처남 박제원(박영효의 계씨)을 데리고 하와이로 갔다. 그곳에서 두 젊은이의 미국 본토 입국을 마련한 후 귀국하여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기선은 시카고에 정착하여 링컨고등학교를 마친 뒤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했다.”


김기선이 미국에 가게 된 사연이다. 당시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이민인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 이민을 주선했던 곳으로 하와이 이민 편에 섞여 김기선이 미국 유학길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김기선은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하딩 후보를 도와 당선시키는 등 큰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선배인 서재필 박사와 함께 미국 교민 지원과 1908년 전명운(田明雲), 장인환(張仁煥) 두 의사의 장거를 지원하는 등 많은 애국 활동을 했다.


김기선은 미국에서 도료(塗料) 회사에 투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귀국해서는 고향인 연희리에 과수원을 개발하는 등 농토를 늘리고 아버지가 창설한 연희예배소를 예배당으로 증축했다. 김포와 인천 근교에도 많은 농토를 마련했고 육영사업을 위해 부평 일대 광활한 토지를 사들였다. 이 땅은 1940년대 일제가 부평 일대에 군수공장을 지으면서 강제 수용 당했고, 농토 역시 광복 후 토지개혁으로 종이장이 되고 남은 것은 연희동 과수원과 율목동 주택뿐이었다.


『인천서구 그리고 사람들』 사진집 속의 이 기와집 교회는‘ 1950년대 모습으로 1903년 김윤화가 설립을 준비하고 1905년 방족신 부평구역 순회전도사가 설립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김윤화가 세운 초창기 교회 사진인지 김기선이 증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늘 하는 말이지만 김윤화, 김기선 부자의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지 않고, 교회 관련 연도 기록조차 분명치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Green서구 233호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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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서구, “아라뱃길 100년 숲조성(식목) 행사” 개최


제71회 식목일과 봄철 나무심기 기간을 맞이하여 인천 서구(서구청, 일반시민, 시민·민간단체 등)와 K-water가 함께하는 아라뱃길 ‘100년의 숲’ 조성 행사를 개최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기다리겠습니다^^*







□ 행사명 :“아라뱃길 100년의 숲 조성 행사”

□ 기 간 : 2016. 4. 5(화) ~ 4.20(수)

□ 장 소 : 아라뱃길 일원

□ 참석인원 : 1,050명(서구청, K-water, 참여기업, 일반시민 등)

                - 인천 서구, 푸르미가족봉사단, 인천비전기업협회, 씨티은행 등

□ 내 용 : 매화나무, 포플러나무, 소나무 등(1,050주) 식재, 흙공던지기 등

□ 2016 아라뱃길 '100년 숲 조성사업'


구분

서구청 K-water

푸르미가족봉사단

인천비전기업협회

씨티은행

(K-water·YWCA)

행사일시

4월 5일

4월 16일

4월 20일

4월 9일

참가인원

500명

200명 

200명

150명

주    빈

서구청장

봉사단회장

비전기업협회장

씨티은행본부장

행사내용

매화나무 심기

포플러심기

아라가꿈이

소나무 심기

산수유 심기

아라가꿈이

흙공던지기

식재수량

250주

500주

200주

100주(3,000개)

행사장

매화동산

두리생태공원

벌말교 아라파크웨이마당

벌말교 아라파크웨이마당

수목제공

서구청

K-water

인천비전기업협회

씨티은행



* 매화동산




* 두리생태공원




* 벌말교 아라파크웨이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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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인천광역시 서구 풍경 52탄!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




 서구의 어른 중에 또 한 분 이훈익(李薰益 1916~2002) 선생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인천 향토사 연구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만큼 많은 저서와 연구 자료를 생전에 남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2002년 첫 『서구사(西區史)』편찬 당시 위원장으로 계셔 말석에서나마 모시고 일한 적이 있다. 


 "본관은 연안이씨, 호는 서계당(西桂當)이다. 서구 연희동에서 출생하여 부평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인천시 공무원으로 27년간 봉직했으며 한때 인천시원예협동조합 전무로 근무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 인천시 향토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983년에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향토사 연구 작업을 인천 전역으로 확산해 나갔다. 『인천광역시사』『부평사』『계양사』『옹진군지』등의 집필위원으로 활동하고 인천의 향토사와 관련된 많은 조사보고서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강연과 신문 잡지 기고에 힘을 기울여 한국 향토사학계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인천충효록』『인천지지』『인천지방 향토사담』『인천의 성씨 인물고』『인천지명고』『인천지방의 전통 제례』『인천 금석비명집』『근세 인천지방의 전란사』 등 8권의 인천 향토사 관련 저술이 있다.


 인천광역시 교육 대상과 인천광역시 문화상 학술부문, 그리고 한국향토문화대상(서울신문사 제정)을 수상하였다. 인천광역시 노인단체연합회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인천광역시 지명위원을 역임했다.


 202년 2월 15일 노령에도 『인천광역시서구사』편찬위원장 겸 인천광역시문화원 창립준비 위원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다가 서구청 청사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인용한 위의 글은 선생에 대해 기술한 것으로 근래에 간행된 두 번째 『서구사(西區史)』에 수록되어 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27년간 인천시 공무원으로서 공직 생활을 지내고도 한가(閑暇)를 마다하고 운명의 순간까지 향토사와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 애쓴 선생의 모습이다. 숙연한 감회와 함께 철저하게 평생의 경험과 경륜을 세상에 되돌려 베풀고 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진 역시 『인천서구 그리고 사람들』에서 옮겨 온 것이다. 촬영 일자가 1953년 3월 27일로 되어 있다. 당시 서곶출장소(오늘의 서구청 전신) 직원 기념 촬영이라고 하는데 무슨 기념인지는 알 수가 없다. 6·25 전쟁 휴전 몇 달 전, 그 시절을 읽게 해 준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당시 부소장이던 이훈익선생이다.

 

Green서구 23호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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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인천광역시 서구 풍경 51탄! <허정 선생>





 허정(許楨 1924~2003) 선생은 경서동 양천 허씨 집성촌에서 출생했다. 서곶공립보통학교 4년을 수학하고 부평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학하여 졸업했다. 1941년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김포군 농회 기수로 일하다가 그해 9월 인천정상공립국민학교(현 서곶초등학교) 교원이 되었다. 1948년 교감으로 승진하여 1960년까지 19년간 근무했다. 


 1960년 고향 서곶을 떠나 김포단봉국민학교, 의정부국민학교 교감을 거쳐, 포천이곡국민학교 교장으로 승진 임명되었다. 그 후 김포군 대명국민학교와 검단국민학교, 연천군 전곡국민학교, 인천 동구 만석국민학교, 부평동국민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중간에 양평군교육청 장학사와 인천시교육청 초등교육계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9년에 정년퇴임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방자치제와 함께 교육자치제가 시행되면서 1991년 인천직할시 초대 민선 교육위원에 피선되어 4년간 인천 교육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그는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1945년 서곶귀향장병단 단장, 1989년 한국청소년인천연맹 자문위원, 1993년 인천광역시서구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인천미추홀봉사단 이사, 1996년 사단법인삼락회인천광역시지회 부회장, 인천광역시서구지명위원, 1997년 대한노인회인천광역시연합회 부회장, 2002년 인천광역시서구사편찬위원으로도 일했다. 교육자 생활 중 서곶에서만 20년 가까이 봉직했던 까닭에 옛 서구 토박이 주민 태반이 그의 제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덕망이 높아 서곶 지역의 사표(師表)로서 평생 중망(重望)을 받았다.


 허정 선생에 대해『 서구사(西區史)』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서구 토박이 태반이 그의 제자’라는 말은 바로 서곶초등학교를 나와 후일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부평향교 전교(典校)를 지내신 서구의 원로 정인표(鄭寅杓) 선생의 담임선생이었다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정인표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허정 선생은 서곶공립보통학교 출신으로 명망이 있어 당시 일본인 교장이 초빙해 왔다고 한다. 허정 선생에 대한 제자 정인표 선생의 추억담은 길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사진은 『인천서구 그리고 사람들』에 실린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졸업식을 마치고 교사들 기념 촬영이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남자 선생님들 양복! 6개, 더블버튼 양복이 아마 당시에 유행했던 모양이다. 사진 중앙 왼쪽이 구형서 교장이고 우측이 바로 허정 교감 선생이다. 이 분을 알아볼 옛 제자분들이 이제 서구에 얼마나 남아 계실지….


Green서구 230호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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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인천광역시 서구 풍경 50탄! <심운섭 선생>




이번 호에는 가좌동 옛 가재울 마을의 큰 어른이셨던 고 심운섭(沈雲燮, 1899~1966) 선생에 대해 몇 말씀 적는다. 선생에 대해서는 <서구사(西區史)>에 대략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청송 심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조선 세종대 영의정을 지낸 심온(沈溫)의 후손인데 심온은 세종대왕의 배필인 소헌(昭瀗) 왕후의 부친이었다.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1919년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서곶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보통학교 과정을 수학하고 중학교 과정을 마친 분으로 기록된다. 인천상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였고, 1940년대에는 인천 중구 인현동에서 환일형제운송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른바 브나로드운동에 나서 가좌동 261번지 자택에다 가재울강승소를 열어 문맹퇴치와 더불어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다. 후에 그는 이 강승소를 확장해 원적산 줄기 아래인 지금의 가정초등학교 자리에 교실과 운동장을 구비한 학교 형태로 확장하여 주민 교육에 열성을 다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남서곶에 국민학교를 개설하기 위해 진력하여 1946년, 마침내 석남국민학교를 유치, 개교하는 데 공을 세웠다. 석남초등학교 개교와 함께 강습소를 닫고 학교 초대 기성회장을 맡아 학교 발전에 힘썼다.


그의 농촌 계몽, 농민 교육 운동은 장남 심재갑에 의해 가좌농민학교로 계승되었다. 가좌동에는 지금도 1715년에 지은 고택이 그대로 남아있다. 선생의 일생과 교육 정신이 이처럼 간단할 리 없지만 서구사에는 간추려서 쓰고 있다."


이 사진은 1930년대 어느 봄날, 선생과 친구 분들이 중구 월미도 나들이에 나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기시는 모습이다. 가운데 서 계신 분이 심운섭 선생이시다. 풍채도 크신 데다가 정식 교직원 직책은 가지지 않으셨어도 교육자 같은 기품이 느껴진다.


사진을 통해 옛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이런 어른들 한 분 한 분이 우리의 오늘을 일구어 주셨기 때문이다. 후대인 우리들이 할 일은 옛 어른들이 살아오신 삶의 법도와 정신을 계승하여 시급히 되살리는 일이다. 요즘처럼 예(禮)와 절(節)이 어그러진 시대에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Green서구 229호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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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동이 노을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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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인천 서구 풍경 49탄! <심덕기 선생>




서구 인물로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선생을 이난(欄) 시작 무렵에 조명했을 뿐, 서구의 인물에 대해서는 산발적으로 인용하는 정도로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시대적으로 가까운 근현대 인물 중에서 대표적인 몇 분만을 만나 보려 한다. 전근대 인물은 워낙 출중한 분들이 많으셔서 게재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서구 지역 인사로서 각 분야에 걸쳐 거명할 분들이 여러 분이 계시나, 우선 인천시 공직에서 크게 활약하셨던 심덕기(沈德基 1911~1992) 선생부터 순서를 잡는다.


“풍산 심씨로 호는 우봉(牛峯)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금촌 금융조합에 근무하면서 일제의 수탈 만행으로부터 민족 자본을 지키기 위하여 고심 노력하면서 8·15광복을 맞았다. 1951년 대한민국 최초로 실시된 지방자치 선거에서 초대 인천시 민선시의원에 당선되었다. 1954년 제2대에도 재선되어 인천시의회 의장에 피선되어 농업과 공업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 정책을 펴는 데 주력했다. 1957년 인천교(仁川橋) 건설을 추진해 인천의 동서 지역 균형 발전을 꾀하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1970년 인천 서구 검암동의 사유지 3만여 평을 쾌척하여 영화중학교를 건립토록 했으며, 육영재단 선진학원 이사장, 정하학원 이사로 있으면서 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묘는 김포시 양촌면 유현리 선영에 있다.”


이상이 서구사(西區史)에 보이는 선생에 대한 기록이다. 간략하게 요약이 되어 있지만 선생께서 서민 생활을 보살피고 시의 발전을 위해 애쓰신 점,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부족한 교육 시설이나 자본을 자비로 충당해 벌였던 육영사업에 크게 공을 세우신 점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훗날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밝히려니와 당시 ‘인하공대’ 발전을 위해 미군 등, 요로에 건의했던 노력도 선생의 뜨거운 후세 교육열의 증거라고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선생의 이력으로, 서구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자유당 당무회의에서 경기도당 부위원장에 심덕기, 김정순양씨를 인준하였다.”는 1958년 8월 17일자 경향신문 기사도 보인다.


선생이 정치가로서 인천에서 주요 역할을 하셨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반드시 선각자적인 인물이 태어나는데 선생도 서구지역의 그런 인물의 한 분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바로 이런 선대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Green서구 228호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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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동이 노을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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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서구 풍경 48탄! <옛 석남동사무소>





아, 이런 사진도 있었구나 싶다. 1960년대라고 하는데 그보다는 더 오래 된 사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60년대에 들어서 연희동, 가좌동 등이 큰 집은 아니더라도 지붕에 기와를 얹고 시멘트를 바른 양옥 건물로 새롭게 단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연희, 가좌동사무소가 신축, 개소한 때가 1965년이니, 이 같은 석남동사무소의 모습은 1960년대 초 무렵까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추측하건대 아직 앞선 두 동사무소보다 착공이 늦어진 까닭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사진을 보니 1960년 중학에 들어가던 해가 떠오른다. 입학 서류로 호적초본이 필요해 그것을 떼러 처음 이런 곳에 갔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호적초본을 떼러 간 곳이 동사무소가 아니고 좀 규모가 큰 출장소이기는 했지만, 문득 그때 생각이 나는 것이다. 


양 팔뚝에 토시를 낀 채, 누런 테를 두른 도수 높은 돋보기안경을 잡수신 서기 아저씨가 두툼한 서류철을 이리저리 들추던 광경이 생생히 떠오른다. 벗어난 이야기지만 조금 더 길게 그때 사정을 늘어놓자면, 아저씨는 우리가 '제기종이'라고 부르던 얇은 괘지(罫紙) 밑에 먹종이(墨紙)를 대고 쓱쓱 달필을 놀려 복사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그 한자로 써진 달필 서류를 소중히 챙겨 들고 돌아오던 기억! 60세 이상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경험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다시 사진 속으로 돌아가자. 몇 평이나 될지. 아무리 커 봐야 그저 10여 평 내외가 아닐까 싶다. 여느 가정집을 구해 동사무소 건물로 개조해 쓴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난해에 새로 이엉을 얹었는지 비교적 두툼한 초가지붕에는 흰 눈이 남아 있다. 


미닫이 식으로 된 동사무소 '정문' 옆에 내려 달린 두 개의 간판 중 오른쪽 것에 "인천시석남동사무소“라는 글자가 돋보기를 통해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아래 石南洞”이라고 크게 쓴 흰 글자는 아마 사진을 보관하던 담당자가 훗날 확인을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그 옆의 간판에는 "대한xx 후원회인천시석남동분회"라고  쓰여 있는 듯한데 나머지 두 글자는 그나마 영 판별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5~60년 전 우리네 관공서 청사의 모습이었다. 혹자는 뭐 이런 사진을! 하며 심드렁하거나 외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초가를 얹고 돌담을 쌓은 집에 살던 시대가 훨씬 정답고 의로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틀림없이 내 아버지, 어머니, 그 앞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이런 집에서 시대를 사셨다. 그런 감회를 느낀다. 




Green서구 제227호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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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동이 노을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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